원문: 한겨레 | 김선식 | 원문 발행: 2021-01-08
소설 속 장소, 지도에 ‘별’ 찍고 가이드북 펼쳐서른 즈음에 알아버린 지독한 취미생활 여전해<여행준비의 기술> 지은이 박재영 인터뷰

“여행이 즐거운 건 여행이 곧 끝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, 여행 마지막 날까지는!” 지난해 가을 타이에 동행한 승우여행사 이원근(44) 대표가 말했다. 그 얘길 출장 마지막 날 들어 다행이라고 여겼다. 그렇지 않았다면, 마지막 날도 아닌데 일상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할 뻔했다. ‘여행 준비’가 취미인 사람은 어떨까. 지난해 11월 <여행준비의 기술>을 펴낸 박재영(50) 작가는 “마지막 날은 당연히 아쉽지만 다음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이 찾아온다”고 말했다. 그는 책 집필 배경을 이렇게 썼다. ‘언제 갈지 기약도 없고 결국 못 가지 싶은 낯선 곳의 지도도 열심히 들여다봤건만, 전 세계의 국경들이 사실상 폐쇄되는 상황에 놓이니, 모든 게 시들해졌다. 문득,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. 내 취미는 여행 준비이지 여행이 아니지 않은가.’ 지난해 12월28일 서울 마포구 <청년의사> 사무실에서 만난 박재영 작가는 “그냥 웃자고 쓴 책”이라고 말했다.

박재영 작가는 취미만큼이나 이력도 독특하다. 그는 의사 출신 저널리스트다.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종합병원 인턴 1년, 공중보건의 3년 생활을 마쳤다. 그 뒤 바로 온라인 매체 <청년의사> 편집국장(1999~2011년)에 이어 편집주간을 맡고 있다. 팟캐스트·유튜브 ‘나는 의사다’, 팟캐스트·네이버 오디오 클립 ‘yg와 jyp의 책걸상’ 프로듀서 겸 진행자이기도 하다.
―의사가 아닌 저널리스트의 길을 선택한 이유는?
“공중보건의를 마치고 정신과 레지던트를 할 생각이었다. 그 무렵 의료 전문 매체 <청년의사>가 본격적으로 언론사 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. 상근직으로 일할 사람이 필요했다. 의학을 공부한 저널리스트의 고유한 역할이 있다고 믿었다. 의사와 환자는 가까워야 하는 관계인데 현실은 그 반대다. 그 가교 구실을 하고 싶었다.

그는 작가다. 현재까지 책 8권을 썼다. 1994년, 2008년 방영된 드라마 <종합병원>(MBC) 두 편의 원작인 <종합병원 청년의사들>(공저)과 <종합병원 2.0>을 펴냈다. 1999년엔 요리 에세이도 썼다. “음식에 관심 많고 미각이 예민한 편”인 그는 “평생 전업주부로 산 어머니께 추억을 만들어드릴 겸” “1년간 집중적으로” 작업해 어머니의 레시피 152개와 그의 에세이를 모아 책으로 냈다. 하지만 그는 대표작으론 2013년에 낸 <개념의료>를 꼽는다. 시민, 의사들에게 국내 의료 시스템 역사와 실상을 알리려고 쓴 책이다. 그는 “다른 책에 비해 압도적으로 공을 들인 책”이라며 “아마도 평생 가장 보람찬 일로 남을 것”이라고 말했다.
―7년 만에 때아닌 ‘여행 준비’를 주제로 책을 낸 이유는?
“약 10년 전부터 쓰려고 했다. 제목까지 정한 책이었다. 코로나19 때문이다. 여행 못 가는 시대에 역설적으로 여행 준비 책을 쓰고 싶었다. 술자리에서 사람들은 내 여행담보다 여행 준비 이야기를 즐거워했다. 그들이 ‘재밌는 책이 될 것’이라며 부추겼다.”

―나이 서른에야 취미가 ‘여행 준비’란 사실을 깨달았다고?
“학창시절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다. 취미가 독서라고 하면 선생님들이 그랬다. ‘독서가 취미라고 하지 마라. 독서는 생활이다.’ 좀 억울했다. 서른살 즈음 누군가 또 ‘취미가 뭐냐’고 물었다. 불현듯 내가 ‘여행 준비’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. 10살 무렵부터 아버지의 애독 잡지 <월간 시각표>(기차, 고속·시외버스, 여객선, 비행기 출발·도착 정보와 가격 등 정보를 제공하는 책)를 읽었고 누나의 교과서 ‘사회과 부도’를 누나보다 많이 봤다. 여행 가이드북과 지도책을 사 보곤 했다. 맘에 꽂히는 곳이 있으면 포스트잇을 붙이고 형광펜으로 칠했다.”
요즘 박재영 작가는 매일 수시로 ‘별’을 찍는다. 하늘에 있는 별이 아니라, 구글 지도에 찍는 별(특정 장소를 기억할 목적으로 인터넷 지도 위에 별 모양을 표시하는 기능)이다. 그의 구글 지도엔 천개가 넘는 별이 반짝이고 있다.
―가장 최근 ‘별’ 찍은 장소 중 기억나는 곳은?
“지난주 <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아>를 읽다가 ‘별’을 찍었다. 덴마크 북부 해안 도시 스카겐에 있는 한 교회다. 소설은 해풍에 밀려온 모래에 파묻혀 첨탑만 남은 그 교회를 길게 묘사했다. 찾아보니 실제 지명이었고, 예전 덴마크 여행을 준비할 때 ‘별’을 찍어 둔 곳이었다. 짜릿하고 기뻤다.(웃음) 또 한 곳 ‘별’을 찍은 곳은 캐나다 퀘벡주 남부 소도시 ‘셋포드마인즈’다. 소설에서 석면 광산으로 한때 번성했다가 쇠락한 지역으로 나오는데 실제 있는 도시다. 그쪽으로 여행이나 출장을 가면 들러 볼 수도 있겠단 생각으로 표시했다. 외국 소설은 실제 지명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 권 볼 때마다 ‘별’ 한두 개씩은 찍는다.”

―별을 찍고 나선 뭘 더 하나?
“그때그때 다르다. 캐나다 퀘벡주에 있는 도시라면 직항으로 갈 수 있는 주변 도시부터 찾는다. 근처에 갈 만한 곳을 더 검색하고, 반경 200㎞ 이내로 범위를 넓혀 지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. 대도시를 중심으로 미식, 쇼핑, 축구 경기장, 명소 등이 있는지를 확인하고 이용 후기를 훑어본다. 그런 장소들이 쌓이고 쌓여서 ‘별’이 많아지면 언젠간 그 지역에 갈 확률이 높아지는 거고, 별 개수가 얼마 안 되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거다.”
그는 ‘여행 준비’를 단지 수단이나 골치 아픈 일로 치부하는 이들에게 말한다. “적어도 내 생각으론, 여행 준비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있는 행위이며, 여러 장점이 있다.”
―여행 준비의 장점은 무엇인가?
“인생은 짧고 여행할 시간은 더 짧고 돈은 늘 모자라다. 여행 준비를 할 땐 수많은 선택지를 놓고 고르는 경험을 한다. 그건 나에게 가장 즐겁고 보람찬 일을 선택하는 훈련이기도 하다.”

그는 취향이 분명하다. 영국 런던이나 프랑스 파리에 두세 차례 방문했을 때 대표 관광지인 영국박물관(대영박물관)과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않았다. 대신 테이트모던, 퐁피두 센터 등 근현대 미술관이나 축구장을 찾았다. 그는 “고대 미술품이나 유물은 어렵고 관심이 적다. 남들이 좋다는 데 말고 내가 좋은 데를 가야 한다”고 말했다.
―여행 준비라는 취미, 단점은 없나?
“모든 취미가 그렇듯 누군가에겐 즐겁고 누군가에겐 재미없는 일이다. 여행 준비가 즐거운 사람에겐 단점이 없다. 돈도 별로 안 들고,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다.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유용하다.”
그는 캐나다 밴쿠버 여행을 앞둔 지인들에게 종종 ‘바드 온 더 비치 셰익스피어 페스티벌’을 체험하길 권한다. 매해 6~9월 바닷가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연극 축제다. 그는 캐나다에 가본 적이 없다. 오로지 ‘여행 준비’로 얻은 정보다. 인터뷰 중 그가 물었다. “최근 가장 맘에 든 여행지는 어디?” 난 얼마 전 전남 신안군 흑산도를 다녀온 얘길 신나게 떠들었다. 적당히 추임새를 넣던 그가 말했다. “역시 아이스 브레이킹(서먹한 분위기를 깨는 일)에는 여행 얘기가 가장 좋다.”

―‘여행 준비’에서 중요하다고 강조한 게 많다.
“후보 여행지를 잔뜩 만드는 게 중요하다. 방송, 책, 신문,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근사한 곳들을 수집하는 게 첫 단계다. 그중 좋아하는 장소를 추린다. 실제 착수하려면 기념일이나 적금처럼 여행의 명분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. 최종적으로 여행 계획을 세울 땐 일정의 20%를 빼서 빈칸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. 현지에서 유통성을 발휘해야 할 때도 생기기에. 현지에서 ‘우아하게 돈 쓰는 데 필요한 영어’도 몇 마디 외워두는 게 좋다.”
―여행 기념 자석을 모으는 사람은 봤지만 만드는 사람은 처음 봤다.
“여행이 어려운 곳을 다녀온 나만의 징표로 ‘냉장고 자석’이 좋은데 안 파는 여행지가 있다. 처음엔 포기했는데, 가볍고 납작한 물건에 양면테이프로 종이 자석을 붙이니 ‘냉장고 자석’이 됐다. 그 뒤론 미술관이든 식당이든 얇고 예쁜 물건이 있으면 눈여겨본다. 집 벽면에 철판 두장을 붙여 ’냉장고 자석 갤러리’를 만들었다.”

인터뷰를 마칠 무렵 그에게 사인을 청했다. 그는 책 내지에 ‘일상을 여행처럼 인생은 관광객 모드로’라고 썼다.
―무슨 뜻인가?
“여행을 가면 평소보다 부지런하게 시간을 쪼개서 움직이고 예민하게 이것저것을 궁금해한다. 평범한 일요일 하루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뜻이다. 한편으론 인생 자체가 긴 여행이니까, 지구별에 몇십년 놀다 간다는 마음가짐으로 너무 집착하지 말고 즐겁게 둘러보고 가자는 취지다.”
처음 <여행준비의 기술>이란 제목을 보고 ‘또 하나의 정신 승리’가 아닐까 하는 노파심을 지울 수 없었다. 그를 만나고 나서 유머라는 진통 주사를 맞고 호기심이란 처방전을 받아 들었다. 온갖 장벽에 가로막힌 요즘, 그가 매일 여행 책과 지도를 뒤적이며 여행을 상상하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놓지 않는 일처럼 보였다. 오늘 할 여행 준비를 내일로 미루지 말지어다.

김선식 기자 kss@hani.co.kr </yg와>